그대로이기/생각

잔인한 4월

보니별 2013. 5. 1. 03:07

 

 

 

 

 

                               잔인한 4월

 

 

  T.S 엘리엇(Eliot)은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 : 1922)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올 우리 한반도의 4월도 참 잔인했다. 올 봄, 한 겨레인 북한은 연례적인 한미연합훈련을 트집 잡아 연일 험악한 폭언을 같은 겨레는 물론, 온 지구촌에다 퍼부었다. 급기야 이 4월엔, 남북 겨레 동질성의 상징인 개성공업지구의 통행을 막고 나서서, 공단 폐쇄의 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엘리엇은 사람들의 잔인함을 왜 찬란한 자연에다 투영하였을까?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렇게 좋은 향기를 피워내는 라일락꽃이 정말 잔인한가? 눈에 보이는 4월의 자연은 그 어디에도 잔인함은 없다. 풀, 나무들은 여러 종이 섞여도 함께 어우러져 잘도 살아내는 모습만 보인다.

 

  하여, 엘리엇의 라일락과 잠든 뿌리는 참 억울하다싶다. 인간들을 위해 열매와 꽃과 잎, 나아가 뿌리까지 식물들은 다 내어주는데, 거기에다 인간들의 잔인함을 가당찮게 덮어씌우니 말이다.

 

  살기위해, 다른 살아있는 존재를 먹어야 하는 슬픈 생존법칙의 운명은 확실히 잔인하다. 식물이 살기위해 물과 공기를 먹는 일도 잔인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내 상식과 상상력으로는 식물이 사는 방식은 잔인하지 않다.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의 삶으로 차원을 옮기면, 그 삶은 확실히 잔인하다. 동물 즉, 미생물부터 인간까지 영위하는 지구촌 삶의 방식은 참 잔인하다.

 

  그런데, 먹히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삶은 참으로 거룩하다.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보다 더 거룩하고 위대한 삶은 없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이 종국에는 다른 삶의 먹이가 되는 지구생태계의 법칙 앞에, 모든 생명들은 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살아있는 동안 순명치 않으면, 죽어서라도 다른 삶의 먹이가 되게 하고야 마는 것이, 지구 어머니가 살아내는 방식임을 어찌하랴.

 

  2013 4월을 보내는 마지막 밤에, 그래도 나는 찬란한 신록의 5월, 계절의 여왕을 맞을 꿈을 꾸련다. 그리고 내가, 사람들이, 이 지구촌을 사는 동안 제발 지구어머니, 저 자연을 닮아가기를 이 잔인한 4월 마지막 날 밤에 간절히 기도한다.

 

 

 

     (2013. 4. 30. 깊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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