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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아침저녁 한 생명의 곁을 지나다닌다. 내겐 봄의 전령사다. 3월 초부터 아가 손 초록 잎을 내밀어 오가는 이들에게 손짓한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찜찜하다. 의문들이 머리를 헤집고 나오기 때문이다. `넓은 들판, 아름다운 시냇가, 따사한 산자락 다 버리고 아가 손은 하필 이 틈바구니에 삶터를 잡았단 말인가. 더구나 도시의 길가 딱딱한 콘크리트 틈에 말이다. 무엇이, 어찌하여 이 여린 생명을 비좁고 오염된 틈에 태어나 살게 했을까.` 마음이 상상의 나라로 날아간다.
바람, 그랬다. 봄바람이었다. 어느 봄날, 강 건너 남녘에서 봄바람이 산들산들 푸른 언덕 넘어오다가 한껏 부푼 하얀 갓털송이를 만난 것이다.
“갓털아, 너는 왜 솜사탕으로 부풀었니? 너 멀리 떠나고 싶은 게로구나. 날 기다렸지? 내가 널 데려다 줄게. 가는 길에 같이 아름다운 봄 구경도 실컷 하고….”
봄바람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갓털 한 움큼을 등에 태웠다. 그리고 살랑살랑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 봄날, 무심한 듯 푸른 언덕을 간질이며 날아가는 봄바람에게 갓털이 말을 건 것이다.
“봄바람아, 너는 왜 풀밭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지나가니? 나를 잘 봐! 이렇게 솜사탕 되어 네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부디 날 저 먼 새 땅에 데려가 달라고 말이야….”
온 나래를 활짝 편 갓털은 멋진 패러글라이딩묘기를 부리며 봄바람 등에 살짝 올라탔다. 난생 처음 탄 비행기가 이륙하듯 마음이 들뜬 갓털은 훨훨 하늘로 날아올랐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봄바람과 갓털 중 누가 함께하기를 청했든, 그런 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둘은 새 땅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씨앗을 함께 감싸 안고 봄 유랑을 했다. 아지랑이와 어깨동무하고, 발아래 펼쳐지는 신록의 박수갈채에 신 나 종횡무진 꿈나라를 휘저으며 날아갔다. 산 자드락 마을이 발아래 지나가고, 커다란 칼라시트지붕 즐비한 공단을 가로질러 푸른 물 쉬어 흐르는 강도 휘저어 넘었다.
어느 순간, 갓털은 기절하고 말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높은 빌딩에 봄바람이 부딪치며 생긴 와류에 휩쓸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한참 후 정신이 들었을 때, 또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도시의 어느 길가 측대 앞에 고인 빗물위에 자신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갓털은 마음을 다잡고, 무엇보다 몸에 씨앗을 매달고 있는지 살폈다. 씨앗은 물가 작은 콘크리트 틈바구니에 끼어, 되레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불행일지도 몰라!`하는 걱정도 뒤이어 몰려왔다. 신났던 봄바람도 갑자기 들이닥친 커다란 빌딩에 혼비백산, 온 몸이 일그러지며 도시를 빠져나가기에 바빴다. 이윽고 철길을 건너 야산에 닿았다.
신록이 보이자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갓털 생각이 났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다른 봄바람을 만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 탓은 아니지만, 갓털에게 미안했다. 어버이를 알기에 통성명도 않고 봄 유람의 벗이 된 갓털이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일이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다시 깨달으며, 봄바람은 갓털이 부디 무사하기를 빌며 말했다.
“민들레갓털아! 미안해. 부디 네 씨앗이 새싹으로 태어나 잘 살아라. 난 너를 믿는다. 네 꽃말도 불사신이잖아….”
내 삶의 길도, 민들레갓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싶다. 산촌에 태어나 무슨 학교 졸업이란 갓털을 달고, 나라의 중화학공업화정책이란 봄바람에 휩쓸려 시험보아 취직했으니까. 또, 직장을 따라 고향 떠나 콘크리트 도시의 한 틈에 뿌리내려 살고 있으므로. 따져보면 학교공부나 취업준비 공부도, 훈련도, 봉사도 모두 새로운 곳에 가 살게 하려고 갓털을 키우는 일이었다.
새로운 봄바람, 기술융합시대란 4차 산업혁명시대의 갓털은 또 무엇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