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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수필가 |
사월 하순 중간 날. 일터의 대체휴일이라 오랜만에 가까운 야산등산에 나선다. 휴일이면 거의 오르던 이 등산길을 올 봄엔, 다른 일들로 오래 오지 못했었다. 사월의 꽃들이 삼월에 피고, 오월의 꽃들도 사월에 피는 기후변화시대를 또 절감한다. 하늘을 이고 갓 피어난 아카시아꽃이 뿜어내는 향기가 저절로 마음메모리칩을 검색한다. 기억모니터에 ‘아카시아궁궐!’이 클로즈업된다. 젊은 날의 자작 합성어다.
돌아오는 길…. 마지막 쉬는 곳의 벤치에 무심코 앉으려는데, 벤치 옆에 까만 비닐봉지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신 여러분, 쓰레기를 소중한 자연에 버리지 말고, 이 봉지에 담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어느 고마운 마음이 서린 봉지다. 비닐봉지를 어떻게 벤치에 걸었는지 살펴본다. 벤치 지지대 사이의 공간을 장식하는 무늬조각물을 이용,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게 걸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다.
나도 전에 등산로를 걷던 중 버려진 비닐봉지를 주워서, 이 벤치 곁의 나뭇가지에 쓰레기봉투로 건 적이 몇 번 있다. 벤치 주위에 담배꽁초가 많았고, 과자 껍질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가 보면, 바람에 비닐봉지가 돌돌 말려있어 쓰레기 넣기가 쉽지 않거나 아예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바람을 고려하여 비닐봉지를 걸 튼튼한 가지를 골랐는데도 그랬다. 이 봉지는 그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고 있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그때 왜 의자는 살펴보지 않았던지 모르겠다. 눈은 잘 보라고 있는 보배인데 말이다.
‘나보다 한 수 위를 사는 분이구나!’ 벤치에 앉으며 든 마음이다. 이어서, ‘나는 이 방법을 왜 찾아내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가슴을 톡 친다. 젊은 날부터 직장에서 실험, 연구, 품질 등을 다루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랬기에 문제를 찾아내고, 연구하고, 해결하는 데는 나름대로 안목을 가졌다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한데, 오늘 그 믿음에 흠 하나를 더 보탠 것이다.
벤치 장식무늬에 쓰레기봉지를 건 눈을 가진 이는 어떤 분일까. 그는 분명 나보다 한 수 위를 사는 분 같다. 우리사회에서 요즈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적폐청산을 제대로 하는 분을 오늘 만난 기분이다. 한편에서는 적폐라 규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보복이라 주장하는 일 같은 것들은 원칙으로 보나, 상식으로 따져도 칼자루 쥔 측의 사법처리 대상은 될지언정 적폐라 볼 수는 없다 싶다.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같이, 만인이 다 고쳐야한다고 하는 것들이 진짜 적폐일 것이기 때문이다.
벤치쓰레기봉지가 나비효과를 낸 때문인지, 벤치주위가 전보다 많이 깨끗해졌다. 옥에 티 같은 담배꽁초 몇 개를 주워 봉지에 넣었다. 손끝으로 봉지 건 분의 따사한 마음이, 가물에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로 전해져 왔다. 봉지에 쓰레기가 차면 그분은 쓰레기봉지를 회수해 처리하고, 다시 새 봉투를 걸 것이다. 우리사회의 숨은 적폐청산가 중의 한분이 그가 아닐까.
해가 서산에 걸터앉기 시작한다. 일어나 집을 향해 걷는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더 짙게 후각세포를 파고든다. 쳐다본 파란 하늘에 아카시아꽃들이 모자이크로 박힌다. 꽃을 맴도는 꿀벌들도 덩달아 모자이크가 된다. 저 꿀벌들은 이 시각에도 하루 꿀 수확량이 모자란 걸까. 무엇 때문에 저리도 열심히 일할까. 일벌들이 가져간 꿀과 화분으로 여왕벌과 수벌도 먹고 살 텐데 억울하지도 않고, 적폐란 생각도 안 드나보다.
그 옛날, 고향집 정경이 어느새 파노라마 되어 마음 스크린에 비춰진다. 남쪽 삽짝 곁에 서서 살던 아름드리아카시아나무. 봄이면 엄청 많은 꽃을 피워 향기를 온 사방으로 뿜어댔다. 온갖 벌, 나비들 찾아와 한 가족으로 살던 곳. 내가 지은 이름 ‘아카시아궁궐’로 손색없던 보금자리. 온 가족이 꿀벌 되어 제 할 일 묵묵히 하며 살았기에, 적폐가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 집….
오늘따라, 지금은 사라진 아카시아궁궐이 사뭇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