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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수필가 |
세레나!
좋아하는 봄꽃들이 사월초순에 다 졌습니다. 개나리꽃, 진달래꽃, 벚꽃, 살구꽃, 목련꽃이 그들입니다. 사월에 필 꽃들이 삼월에 피었으니 일찍 진 것은 당연한데, 마음이 개운치 않으니 웬일일까요? 그나마 겹벚꽃과 라일락꽃이 피어 아직은 꽃피는 봄이라 일러줍니다. 그 곳은 어떤가요? 아마도 비슷할테죠.
오늘아침 출근길에 불현듯 ‘내가 뭐하고 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척에 라일락꽃을 두고도 자주 가지 않는 방향이라고 내음 한번 제대로 느껴보지 않고, 또 이 봄을 소진하는 한심한 존재’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보고 느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봄꽃들에게 문을 닫고 산 게지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고 언젠가부터 생각하고 다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세레나.
라일락꽃 앞입니다. 실로 한해 만에 맡아보는 진한 라일락꽃내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아카시아꽃내음이나 인동초꽃내음, 치자꽃내음과는 또 다르게 후각세포를 막 일깨웁니다. 마음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탔나봅니다. 그 옛날, 신혼시절로 바로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이른 봄날 같던 늦겨울 2월에 결혼하고, 몇 달을 우리는 주말신혼부부로 살았지요. 직장 때문이었습니다. 군청에 근무하던 새색시가 어떤 마을에 출장 갔다가, 라일락묘목을 얻어 시가 댁 마당에 심었습니다.
첫 며느리를 얻은 시아버지는, 새아기에게 하듯 소중하게 라일락나무를 돌보았습니다. 라일락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며 봄마다 온 집안을 함께 사는 향기로 감쌌습니다. 부모님은 라일락나무를 멀리 사는 맏아들 집처럼 여기고 사신 듯합니다. 마루 가까이 심은 것이며, 며느리가 가져 온 나무라고 애지중지 하시는 걸 종종 보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라일락나무에다 자식과 며느리, 손주들을 그려 넣고 바라다보며 그리움과 기다림을 달래면서 살았다 싶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잘도 흘렀습니다. 라일락나무도 어느새 고목이 되어갔지요. 그 사이 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 가시고, 어머니도 몇 해 후 뒤따라가셨습니다. 고향집에는 늙은 라일락나무만 동그마니 지키게 되었습니다. 물론 배롱나무나 향나무, 화초 몇 본과 함께였지만 내 눈에는 라일락나무가 외로워만 보였지요. 그나마 동생부부가 고향집 지키며 사는 것이 고맙고, 다행이라 여기며 지냈습니다. 어머님 제삿날이 초파일이어서 갈 때마다 라일락꽃내음이, 부모님의 향기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세레나.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지 싶습니다. 아버님 제사 지내려 고향에 갔는데, 라일락나무가 베어지고 밑둥치만 남았지 뭡니까. 동생에게 라일락나무를 왜 베어 냈느냐고 물었더니, 고목이 되어선지 진딧물이 많이 끼어 그랬다 했습니다. 속으로 안타깝고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날, 고향집 라일락나무는 내 마음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새댁 아내와 뛰놀던 아이들과 함께, 수채화로 그려져 스며있기에 더 향기로운 라일락나무로 말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의 집에 살 수 있다’는 진실을, 이 아침 라일락꽃내음에서 또 느낍니다. 생활이란 핑계를 멍에로 걸고, 오늘도 걷고 있는 자신도 또다시 만납니다. 삶이 비록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사인곡선일지라도, 그 길목에서 가끔은 라일락꽃내음도 즐기며 걸어가야 한다 싶습니다.
부디 라일락꽃내음 향기로운 봄을 맘껏 누리기 빕니다. 세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