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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반환지점에 도착했다. 자주 오는 등산길의 첫 번째 운동시설이 있는 곳이다.
팔 굽혀펴기와 허리 젖히기를 하러 가는데, 저쪽 소나무 밑동 앞에 전에 없던 하얀 것이 보였다. `누가 액운 막으려고 소금을 뿌렸나보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평소처럼 운동을 했다. 마지막으로 허리 돌리기를 하려고 회전판 쪽으로 향하는데, 그 옆에도 소금 같은 흰 것이 놓여있었다.
어떤 이가 두 군데나 소금을 뿌렸다 생각하니,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다. 가족이 이 운동시설에서 다치기라도 했나. 자기 집 문간도 아닌 산에 소금을 뿌리다니. 산에 소금을 뿌린 것을 본 적은 없는데. 먼 이곳까지 소금을 가지고 온 정성이 지극하네. 소금 뿌리는 풍습도 양밥[禳法]에 포함될 테지…. 회전판이 가까워졌다. 미심쩍어 소금에 다가가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하얀 것은 소금이 아니라 쌀이었다. 누군가 솔가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하얀 쌀의 성찬(盛饌)을 차려놓았다. 산새들이나 다람쥐 같이, 산에 사는 생명들이 먹으라고 자기 쌀을 가져다 소담스레 차린 숲속 밥상이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그래.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게야! 이처럼 아름다이 마음 쓰는 분이 함께 살고 있으니까!” 이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은 헛말이 아니었어”라는 속말도 들렸다.
회전판에 올라서서 잠시 하얀 밥상을 바라다보았다. 궁금증이 도졌다. 저 쌀은 어느 집 것일까. 아니면, 어느 식당이나 단체의 것일까. 귀한 쌀을 가져와 산에 사는 생명들과 나눈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사는 분일까, 여럿이 사는 분일까. 아이일까, 어른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아무튼, 숲속 생명들에게 하얀 밥상을 차린 이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분일게다. 쌀 곧, 먹을거리는 자기 생명이 아닌가.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게 생명이다. 하여, 쌀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나누는 일이 된다. 세상에 자기 생명을 나누는 일보다 더한 사랑이 있을까. 모름지기, 나누지 않는 곳에 사랑이 자리할 리 없다.
이 숲에 자기 생명을 나누며 사는 분이 함께 오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즐거워졌다. 어두운 세상에서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만난 기분도 들었다. 자연과 교감을 나누고, 그 안의 생명들과 먹을거리를 나누며, 행동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분은 인류애는 물론, 하늘같은 큰 사랑의 나라에 사는 백성이리라. 언젠가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 그땐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하며, 가없는 그 마음을 배우고 싶다.
부디 이 숲속 생명들이 하얀 밥상 주인의 뜻에 따라, 성찬을 잘 먹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며 산을 내려온다. 나도 모르게 요즈음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과, 소담스런 숲속 밥상이 대비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 이성(理性)이 마비되었던 이 땅…. 미움과 네 탓, 대립과 분열로 달구어졌던 광장의 촛불이나 태극기의 모습은, 이 밥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하면 초라하고, 부끄럽고, 추하기 짝이 없다 싶었다.
능선으로 내려오다가 마지막 묘소 부근에 다다랐다. 묘소 뒤에는 언제부턴가 커다란 죽은 소나무가 뉘어져 있어, 사람들이 통나무의자 삼아 잠시 앉아 쉬곤 하는 곳이다. 누가 버린 사탕 포장지가 보여 주우러 갔다. 그런데, 통나무의자 뒤에도 똑 같은 쌀 밥상이 있는 게 아닌가. 숲속 밥상 주인은 마음이 얼마나 넉넉하기에 여러 곳에다 하얀 밥상을 정성스레 차렸단 말인가. 아마도 내가 가지 않은 먼 여러 곳에도 숲속 생명들의 밥상을 마련했을 터다.
더 큰 기쁨이, 하늘로부터 내 가슴을 지나 땅까지 찌르르 흐르는 기분이다. 내 마음은 속삭였다.
`맞아! 세상은 들여다보면, 살만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