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디딜 곳 없는 길

보니별 2024. 11. 12. 00:14

 

            등록일 2024.11.11 18:27                                  게재일 2024.11.12 

 

 

 

10월 하순. 며칠 전부터 출, 퇴근길에 일부러 안 가는 코스가 생겼다. 디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에 오륙 년 만에 순례 갔던 베론 성지에는 똑같은 상황인데도 디딜 곳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냄새는 베론이 훨씬 심했다. 그런데도 사람 걷는 곳엔 그 열매가 하나도 안 보였다. 누가 주워서 치운 누런 은행 열매가 개울가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때문에, 근처에 가면 악취가 더 난 것이다. 성지 관리자들의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저절로 눈에 보여 참 고마웠었다.

 

한데, 반 시간 정도 걸어 출, 퇴근하는 이곳 보도에는 요즈음 떨어진 은행 열매로 발 디딜 곳이 마땅찮은 데가 여럿이다. J 초등 옆 교차로 보도 한 곳은 특히 심하다. 이곳은 금방 떨어진 은행 열매가 온 보도를 채워 밟지 않고는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디딜 곳이 생길 때까지 다른 길로 다니기로 한 것이다.

 

떨어진 누런 은행 열매를 요리조리 피해 걷노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뇌리에 오간다. 도로 관리 당국에서 가로수를 심을 때 아예 수은행나무만 골라 심으면 이런 불편이 없을 게 아닌가. 그 많은 공무원은 다 탁상공론만 하는가. , 아침마다 길거리 휴지 줍는 시니어 인력을 활용해 쓸어도 될 텐데, 관리자들은 현장에 한 번 나와 보기나 하는가. 나아가, 전에는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은행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워 갔는데 모두 잘 살아선지, , 그분들이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들이다.

 

그러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너는 무얼 했는데?’하는 마음의 소리가 머리에 알밤을 주었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은행나무에 미안해진다. 만일 수나무만 있다면, 이 지구촌에 페름기에 나타나 2 7천만 년 동안 면면히 대를 이어 오기에 살아있는 화석이라 부르는 은행나무가 그만 손이 끊어지게 될 테니까.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에 수십 종이 살며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은행나무. 당시는 공룡이 은행을 먹고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은행나무가 한종만 남은 원인은 공룡의 멸종과 기후변화로 등으로 보고 있다.

 

은행나무가 살아있는 화석이 된 비결이 무얼까. 전문가들은 강인한 생명력을 들고 있다. 우선, 열매껍질에 악취와 독성이 있는 화학성분이 들어있어 곤충이나 동물들이 은행 열매를 피하도록 한다. 그 예로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지점 2km 반경 안에 있던 6그루의 은행나무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단다.

 

어쩌면, 현생인류 우리 호모사피엔스도 은행을 닮아가는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란 이상한 껍질을 몸에 둘러싸고 살아가니 외부 생명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사는 영역에 다른 동물들은 발디딜 곳이 거의 없어졌다. 산을 접한 농지에는 철재나 전기울타리도 모자라 하늘에 조류 방지망까지 씌운다.

 

다른 생명들과 만남을 끊고, 과학기술만의 힘으로 인간이 지구촌과 다른 별에서 지속 가능할까. 이것이, 은행 열매 떨어져 디딜 곳 없는 길이 내게 주는 메시지이다.

 

'어울리기 > 발표 글-경북매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정상 소리  (0) 2024.10.21
다른 전문가 시각  (0) 2024.10.07
망령 안개  (2) 2024.09.02
환경권  (0) 2024.08.20
해발 2.53미터  (0) 2024.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