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수필)
첫 쓰르라미 소리가 녹지에 윤슬처럼 일렁거린 지도 한 주가량 지났다. 작년엔 못 본 귀한 만남이 찾아온 곳이다.
사람에게 해로운 풀이 안 자라고, 찌를 가시나무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이 큰일나지 않을 녹지다. 작년에는 가지치기와 잦은 벌초로 이곳을 정물화같이 다듬었었다. 어쩌면, 수더분한 이 녹지가 도심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동들 마음에 푸른 생명의 숲으로 자리 잡아, 올곧은 심성을 기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새 교장선생님은 나와는 마음 주파수가 비슷한가보다. 학생들이 놀더라도 다칠 위험이 거의 없는 녹지를 그냥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람이 즐기려고 만든 정원이나 골프장같이 손을 댄 자연보다는, 지구가 빚어내는 자연이 인간과 뭇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터전일 테니까.
녹지 가운데쯤 아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루터기 아래, 솔가리 내리는 곳엔 재작년부터 새로운 생명 한 종이 자리 잡고 산다. 장미꽃 만발하던 때부터 생명은 가을빛을 띠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누런빛 짙어지며 이삭이 익어가더니 유월 중순엔 다 여물었다. 키 작고 이삭과 낟알도 잘아서, 처음엔 개보리라 여겼다. 궁금해 웹을 찾아보고서야 맥주보리라는 걸 알았다. 솔가리 영역에 맥주보리밭이라니, 난생처음이다.
도대체 맥주보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사람이 씨 뿌렸을 리는 없고, 제비가 올 흥부네 집도 없다. 나무에 주는 거름 따라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알 수 없다. 솔가리는 알레로케미칼스(allelochemicals) 곧, 상호대립억제작용성분이 강해 곁에 다른 식물의 생장이 거의 불가능하단다. 이런 솔가리의 땅에 세간나 터 잡은 맥주보리다. 게다가 햇빛과 거름도 모자라니 엎친 데 덮친 고난의 밭이다.
맥주보리는 주어진 역경에 자신을 순치(馴致)하며 이겨 나간다 싶다. 때문에, 자라는 모습이 어딘가 허약체질로 보였을 터다. 올해 삼 대째 이어 살며, 밭도 많이 넓혀 소나무 가지 아래 땅의 절반은 차지했다. 무엇보다, 작년의 잦았던 벌초를 이겨낸 게 장하다. 그동안 꿋꿋이 살아내는 맥주보리를 보는 가슴이 왠지 싸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여태 도시에서 살아내는 나를 닮았기 때문일까.
유월 어느날 퇴근길. 소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막 다 익어 보이는 맥주보리 이삭에서 낟알 한 개를 떼 냈다. 그 옛날 보릿고개 넘던 시절, 엄마와 풋보리 방아 찧던 기억을 떠올리며 껍질을 까 보고 싶어서다. 손톱으로 조심조심 깠다. 열매를 찾을 수 없었다. 세 개째 깠을 때, 비로소 좁쌀 크기 정도의 타원형 낱알 한 개를 얻었다. 실망스러운 맥주보리 쌀알이다.
사람이 안 하는 맥주보리의 가을걷이는 자연이 대신했다. 아니, 원래 자연이 하던 일을 사람이 빼앗은 게지. 어린 참새들이 어미와 함께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추수 대열을 이룬다. 저 발랄한 추수꾼들은 삭막한 도시 어디에다 집 짓고 알을 낳아 새끼들을 키워냈을까. 손톱으로 까기도 힘들던 맥주보리 낟알들을 바지런히도 거둬들인다. 비둘기와 까치가 자주 추수를 돕고, 어떤 날은 까마귀도 잠시 참견한다. 드물게 노랑턱멧새가 오는 날도 있다.
유월 말이다. 어찌 보면, 낟알 집이 흑진주다. 이런 흑진주는 처음이다. 가을 들판이 떠 올랐다. 내 마음은 왜 유월에 누른 가을 들판에 달려갈까. 짙푸른 쑥과 다른 풀들이 밭 주위를 빙 둘러싸고 서서, 흑진주의 사열을 받는다. 여름 녹음이 부르는 생명의 찬가가 온 누리에 퍼지며 하늘로 오른다.
칠월 중순이 왔다. 맥주보리는 아예 몸통째 드러누우며. ‘누가 나를 거둬주세요!’ 한다. 때아닌 늦가을이 온 것이다. 사람이 농사짓는 늦가을 들녘은 텅 비어 쓸쓸하다. 하나, 이 밭은 다르다. 푸른 풀들이 함께 살기도 하지만, 그보다 맥주보리가 순차적으로 눕기 때문이다. 이삭과 잎이 먼저 고개 숙여 내려앉는다. 대는 볼일이 남았는지 선 채로 삭정이처럼 버티다가 결국 하나, 둘 눕고 만다.
도심 학교 녹지가 계절과 기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사무실에 오가며 하루 두 번은 만날 수 있다니, 내겐 행복이요 슬픔이다. 좁은 녹지이지만 대 자연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음이 행복이요, 이곳도 어김없이 환경과 기후변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슬픔이다. 어느 시댄들 행복과 슬픔이 없으리오만은, 오늘날과 같은 기후 걱정은 일찍이 하지 않았었지 않은가.
자연 품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 자드락으로 돌아가는 실존이 인간이다. 생태계의 동물과 곤충, 식물과 미생물도 생명이란 점에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자연은 온갖 생명이 서로 먹고 먹히며, 어우러져 사는 생태계를 품어 안아 살린다. 하여 자연은, 뭇 생명의 어버이다. 만일 인간이 달이나 다른 행성에 이주하여 산다 해도, 그곳 역시 자연이다.
어버이는 세상 무엇보다 강한 존재다. 어버이가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보다 귀하고 강한 일이 또 있을까. 서구 문명이 지구촌을 휩쓸면서 인간은 물질문명에 홀리고 말았다. 인간이 어버이 자연을 무시하고 제 물건 다루듯 하다가, 그 분노를 산 것은 익히 아는 바다. 사람이 계속 정신 못 차리자 이젠, 자연이 인간을 혼내는 단계에 접어든 게 분명하다. 올 장마의 폭우만 봐도 그렇다.
사람이 벌초하지 않고 놔둔 녹지를 어떤 이는 어수선하다 할지도 모르나, 내 눈에는 어릴 적 뛰어놀던 자연 모습 그대로다. 덩달아 상상의 나래가 미래로 날아간다. 어느 훗날, 이 도시에서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변해갈까. 풀 나무들은 우선 운동장부터 시작하여 골목, 도로, 건물 옥상과 틈새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건물도 허물어지고 마침내 이 도시도 푸른 초원과 숲으로 변할 테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했던가. 이 말을 남긴 노자는, 지구촌의 오늘날을 그 옛날 내다보기라도 했을까.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할 대상으로 삼은 서구 문명의 결론이 오늘의 지구촌 생태계와 기후라면, 인류의 내일은 어디로 가는 걸까. 녹지 소나무 아래에서 만난 맥주보리의 삶은, ‘무위자연’이란 커다란 숙제를 나와 너의 아린 가슴에 안겨주고 있다.
- <수필미학> 2024. 가을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