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클로버, 다모작 도전장 내밀다

보니별 2019. 7. 15. 15:50


                                                               클로버, 다모작 도전장 내밀다
                                                                                                                               강 길 수




회색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이 나무와 풀들을 스캔하고 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만든 녹지(綠地)다. 따가울 여름 햇볕을 향해 풀, 나무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열렬히 환호하는 주인공은, 하얀 꽃을 내민 클로버다. 해님에게 잘 보이려 함인가. 한 톨의 햇빛이라도 더 받으려는 몸부림일까. 
 

장마철인데도 클로버는 올해 들어 두 번째 꽃피우기를 하고 있다. 아니, 사실을 말하면 벌써 네댓 번째인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 소나무 아래서 월동한 클로버들은, 이월부터 한두 송이씩 줄곧 꽃을 피웠으니 말이다. 지난 봄엔 이상할 정도로 알차고, 다부지고, 통통한 꽃들을 촘촘히 많이도 피워냈었다. 그 모습이 결전을 앞둔 선수들처럼 결연해 보였고, 무명의 선수가 도전장을 내미는 초조함도 깃들어 보였다.

지금 피우는 꽃은, 지난봄보다는 약하고 순하여 예전에 보아왔던 그 모습이다. 마음이 찜찜하여 백과사전에 ‘클로버’를 찾아보았다. 개화기가 육, 칠월이란다. 그러니 지금 피는 꽃이 정상(正常)이고, 이월부터 봄까지 피웠던 꽃은 비정상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기후 변화가 불러온 자연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클로버의 도전장 안에 서려 있을 것이란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클로버들과 이웃하며 출퇴근한 지가 벌써 네 번째 여름을 맞았다. 그간, 클로버가 녹지에서 차지한 영역이 어림잡아 열 배도 더 커져 보인다. 처음엔 보도 옆에 보도블록 네댓 장 정도의 넓이로 두세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녹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장미꽃이 계절을 잊고 피어난다든가, 다른 꽃들도 꽃피는 시기를 모르고 피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클로버는 왜 한해에 저토록 여러 번 꽃을 피울까. 자기가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라도 느끼는가. 유럽이 원산지인 풀 클로버는 씨앗 번식 외에, 마디에서 뿌리가 내리며 개체를 늘리며 살기에 적응력이 강하다. 그런 풀이 꽃을 여러 번 피우는 이유가 뭘까. 다모작(多毛作)에 목숨이라도 걸었단 말인가. 하긴 동물처럼 움직일 수 없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다모작인지도 모른다. 씨앗을 많이 퍼뜨려 놓아야, 그중 일부라도 변화된 세상에 살아남을 게 아닌가. 


외유내강으로 사는 저 하얀 클로버꽃은,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 클로버가 내미는 ‘다모작 도전장’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살아야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체제와 이념, 국가와 민족, 종교와 신념 같은 것들이 뭘까. 그것들이 무슨 대수라고 거기에 매달려 아웅다웅하며, 지구촌 모든 생명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등한시하고 외면할까.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고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설파했다. 

어찌 보면, 생명체 중에 인간이 가장 무디고 멍청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지구촌의 유일한 이성적 존재라고 자화자찬하면서, 목숨 걸린 기후변화에는 발 벗고 나서지 않고 사니 말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는 패권과 금력 쟁탈에 빠져, 이성을 마비시킨 존재가 현대인이란 말인가.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환경선언’이 채택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이후, ‘리우선언’이나 ‘교도의정서’같은 기후변화를 다룬 국제 협약이 있었으나. 피부에 와닿는 실천 현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미국 국토 넓이의 땅에 일조(一兆)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지구온난화에 대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보도를 보았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크라우더연구소 프랑스와 바스탱 박사팀이 주인공이다. 기존 도시나 농경지를 그대로 두고, 어디에 얼마의 숲을 새로 조성 가능한지에 대한 계량화 연구다. 결과, 숲 가꾸기를 통해 지구촌에 삼분의 일 가량의 숲을 늘릴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리되면, 산업화 등 인간에 의해 대기에 오염된 삼천억톤에 달하는 탄산가스 중, 이천오십억톤을 늘어난 나무가 흡수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무나 풀이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공기 중 탄산가스를 흡수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도, 환경의 위험을 인지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지구촌은 발 벗고 나서지를 않았다. 이런 여건 하에 숲이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것을 과학적으로 계량화하여, 달성 가능한 목표로 제시한 연구가 발표된 일은 고무적이다. 지구온난화와 생태환경의 황폐화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 모든 생명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지구온난화로 머지않아 북극 얼음이 다 녹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온난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이다. 풀 클로버는 기후변화에 곧바로 도전하여 저렇게 다모작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겨울 끝자락부터 시작된 클로버의 하얀 꽃 다모작 도전장은 어쩌면 인간에게 내민 경고장인지도 모른다. 이 미증유의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만든 자업자득이니 꼭 결자해지하라고. 그리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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