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대 추 나 무
강길수(姜吉壽)
현관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에 달려든다. 물뿌리개의 산수(散水)뚜껑을 빼내고 굵은 한줄기의 물을 화분에 준다. 많은 양의 물을 부어도 화분 밑으로 여분의 물이 빠져나오질 않는다. 화분속이 바짝 말랐다는 증거다. 물을 주고 나서도 대추나무에게 미안하다. 기온이 섭씨 삼십 오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직사광선이 비치는 콘크리트 위에 놓여진 화분의 운명이니 흡족한 물을 주어도 며칠이나 갈까.
대추나무는 작년에도, 올해도 물을 주지 않아 두 번씩이나 생잎이 말라죽었다. 세 번째 새 잎으로 갈아입히기 위해 물을 주는 것이다. 지난해에 처음 잎이 말라붙었을 때, 대추나무가 꼭 죽은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섭섭했는지 모른다. 푸르게 잘도 살던 잎이 물이 없어 강제로 말라버린 모습은 가을에 노랗게 단풍든 잎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을의 낙엽이 행복한 한생을 다 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복된 귀향이라면, 물이 없어 푸른색 그대로 말라 떨어지는 잎은 나라와 부모를 잘못만나 굶어 죽은 어린아이의 천진하기에 더 처참한 주검과도 같아보였다.
바짝 마른 잎 한 닢을 만져본다. 금방 바삭거리며 부서진다. ‘내가, 내 무관심이 너를 죽였구나!’하는 회한이 소용돌이친다. “대추나무야, 미안하다!”하고 중얼거리며 소생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을 준다. 지난해에 처음 잎이 말랐을 때, 매일 나와 쳐다보고 어루만지기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자신과 대추나무에게 다짐에 또 다짐을 했건만, 올해 또 두 번씩이나 그랬으니, 나는 대추나무는 물론, 자신을 세 번 씩이나 속인 죄인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지난해도, 올해도 대추나무는 삼 세 번을 모두 꿋꿋이 새 잎을 싹틔웠다. 말복을 넘긴 여름이지만 원망은커녕, 봄철의 연록웃음으로 잎을 살랑거리며 다시 나를 반겼다. 연록 잎들 옆에는 새로 났다가 잎과 함께 말라죽은 실가지들이 듬성듬성 있다. 처음에는 모두 잘라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이유는 우선 자연 상태로 두어 대추나무자신이 필요 없다 싶을 때 떨어지도록 함에 있고, 다음으로 그 마른 실가지들로 인해 내 게으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다.
우리 집 베란다 밑에 있는 토종대추나무 한그루에 물을 주는 이야기다. 대추나무는 오년 전 내가 근무하던 곳에서 우리 집으로 분양해온 나무다. 그러니까 대추나무 입장에서는 제 뜻과는 상관없이 내 뜻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해 온 것이다. 그 것도 땅이 아닌 중형 플라스틱화분의 두 삽 정도의 흙 속에. 그 때문에 대추나무는 그 험난한 인고(忍苦)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직책상 다른 직원들보다 주위환경이며 공장, 건물, 설비들, 각종 서류들을 더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문 왼쪽으로 조성된 작은 화단에는 다른 나무들과 함께 토종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해마다 늦가을이나 이른 봄의 어느 토요일엔 화단에 있는 나무들의 가지치기도 직원들과 함께 하곤 하였다.
다른 나무들보다 늦게 잎이 나서 꽃이 피고, 가을이면 빨갛다 못해 검붉게 빛나는 작은 토종대추가 참 많이도 달리던 대추나무였다. 깊어진 가을아침에 출근해 보면, 화단에는 물론, 마당이나 인도블록 위, 심지어 도로에까지 잘 익은 대추가 떨어져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곤 하였다. 우리는 익은 대추를 따 먹기도 하고, 떨어진 대추는 주워 차를 끓이기도 했다. 그래도 남아 집에 가져오면 아내는 한약이나 삼계탕 등의 유익한 재료로 쓰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나는 대추나무 앞마당 가장자리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새에서 대추나무 새순 하나가 돋아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에구 어린대추나무야, 저 땅 좋은 화단을 두고 하필 콘크리트 틈새에서 태어나다니…. 참 불쌍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리고 가냘프지만 햇빛에 연녹색으로 빛나며 살랑거리는 모습이 마치도 갓 얼굴이 피어나는 생기발랄한 소녀를 보듯 예뻤다. 비록 고통스러울 콘크리트틈새이긴 했지만, 대추나무는 아랑곳 않고 잘도 자라났다. 한 이태쯤 지났을까. 새순 대추나무는 제법 굵어지고 키도 사오십 센티미터 정도로 자라나 그냥 둘 수 없게 되었다. 한 직원은 뽑아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만류하고 그 대추나무를 우리 집으로 가져와 관상용으로 키워보자고 마음먹었다. 대추나무에게는 고생 끝, 내게는 즐거움 시작이기 때문에.
그해 늦가을, 조금 큰 플라스틱 화분을 하나 마련하여 그 곳에 대추나무를 옮겨 심고 우리 집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이듬해 봄엔 베란다가 따뜻하여 다른 대추나무보다 일찍 잎이 나고, 꽃도 몇 송이 피었다. 아울러 새순도 쑥쑥 잘 자랐다. 줄기 수도 하나 더 늘어났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 아주 작은 대추가 몇 개 열린 고 귀여운 모습이란! 그대로 생명의 환희요, 감동이며, 아름다움이었다. 화분이란 환경 때문에 줄기가 잘 굵어지지 않는 것 빼고는 너무 잘 자랐다. 이태쯤 후에는 키가 일 미터도 넘고 가짓수가 늘어나 다른 화분에 방해를 줄 뿐만 아니라, 통행에도 방해를 주었다. 아내는 밖에 내어 놓든지 밭에다 심자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대추나무를 대폭 가지치기하였다.
그렇게 또 이태가 흘렀다. 대추나무는 사지를 예리한 가지치기가위로 잘렸음에도 잘도 자라며 살아냈다. 아내는 수차례 대추나무를 옮겨 심을 것을 청했으나 나는 못들은 척하였다. 대추나무를 볼 대마다 그 내력으로 인해 애착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대추나무가 베란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베란다 밑에 내려놓았음을 직감했다.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나아가 보니 예상대로였다. 나는 물을 주며 ‘앞으로 네게는 내가 물을 주마.’하고 다짐하고는 아내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겨울철을 빼곤 일주간에 한번 정도로 대추나무에게 물을 주는 것이 내 일상(日常)이 되었던 것이다.
더운 바람 부는 여름날, 대추나무에 게 줄 물을 들고 그 앞에 앉았다. 삼 세 번째 새로 나서 반짝이는 연녹색 새잎들을 쓰다듬어 본다. 나는 말했다.
“대추나무야, 미안하다. 네가 나 때문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시집와서, 내 무관심으로 이리도 혹독한 고생을 하는 구나. 무심한 내가 밉지! 너를 좋은 땅에 옮겨 주련?”하고.
대추나무는 후끈한 바람에 그 생기발랄한 잎을 살랑대며 반짝인다. 내 말이라도 알아들은 듯 더운 바람도 아랑곳 않고 신나게 춤춘다. 대추나무를 바라다본다. 춤추는 대추나무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주인님, 저는 이 화분속이 되레 기뻐요. 제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주인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랍니다.”라고…….
( '보리수필' 창간호 2006. 12. )